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리드리히 부르크뮐러 (문단 편집) == 개요 == [[독일]] 출신의 [[낭만주의]] 작곡가 및 피아니스트, 음악 교사. [[라인 동맹|라인 연방]]의 레겐스부르크 대공국에 속한 라티스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부르크뮐러와 동생 노르베르트 부르크뮐러도 작곡가였다. 그의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이자 가수인 테레즈 폰 잔트였다. 1829년 루드비히 스포어와 모리츠 하우프트만과 함께 공부하기 위해 [[카셀]]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그는 1830년 1월 14일 첫 콘서트로 데뷔한다. 1832년 [[파리(도시)|파리]]로 이주했다. 그때 나이는 26세. 그의 형 노르베르트 부르크뮐러는 1835년 파리에서 그와 합류할 계획을 세웠으나 그는 1년 후 간질 발작이 일어나는 동안 아헨에서 타계. 파리에서 부르크뮐러는 프랑스의 음악을 받아들였고 그의 연주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그는 피아노를 위해 살롱 음악을 많이 썼고 여러 앨범을 냈다. 또한 어린이들을 위한 피아노 연습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그는 1874년 2월 13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흔히 "부르크뮐러 25개의 연습곡"(Op.100) 이라는 이름의 교본으로 익숙하다. 피아노를 막 시작한 연주자들이 [[바이엘]]을 떼고 [[카를 체르니|체르니]] 100번 또는 [[무치오 클레멘티]]의 [[소나티네]] 등과 병행하면서 익히게 되는 에튀드. 보통은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 처음 접해보게 된다. 사실상 이 무렵에는 [[하농]] 에튀드, [[고전파]] 작곡가에 속하는 무치오 클레멘티와 카를 체르니, [[바로크]] 작곡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바흐]]의 [[인벤션과 신포니아]](인벤션) 등을 연습하게 되는데, 어린아이들에게는 이것이 상당히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게 사실. 그 와중에 부르크뮐러는 사실상 이들이 처음으로 접해보게 되는 프랑스 낭만주의적[* '프랑스 낭만주의' 음악은 대체로 소박하고 호화로운 분위기 속 작곡된 작품이기 때문에 더욱 아이들의 마음에 와닿았을지도--하농은?--.] 음악이기 때문에 상당한 인상으로 남는다. 게다가 모든 에튀드가 표제를 달고 있는 표제 음악이며, 그 주제도 어린이들에게 적합하도록 아름다운 것들로 선택되었다. 일례로 Op.100 No.4 "작은 모임"(La petite Reunion)은 어린이들 몇몇이 하나 둘씩 모여서 놀다가 흩어지는 것을 주제로 하고 있으며, No.6, No.10, No.13, No.16 등을 봐도 어린이의 시선에서 주제를 고르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그 덕분에 이 티없이 맑고 순수한 세계의 연습곡은 어린이들의 동심에 제대로 직격, 오늘날까지도 많은 어린 피아니스트들의 고사리 손으로 연주되며 사랑받는 에튀드가 되었다. 그렇다고 부르크뮐러가 꼭 간단하고 소박한 곡들만 썼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일례로 Op.109 "18곡의 에튀드" 는 보다 기교적으로 복잡하며, 어린이의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른들의 감성(?) 역시 건드린다. No.5 "샘물"(La Source) 같은 경우를 보면 주어진 제목을 시각적(?)으로도 매우 잘 표현해 냈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이하의 두 작품 목록의 표제들을 살펴보면 전반적인 권장 연령(?)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부르크뮐러는 이 두 연습곡집만 쓴 것은 아니고 [[발레]] 곡도 쓰기도 했지만, 오늘날 부르크뮐러는 주로 쉬운 어린이용 연습곡집을 쓴 음악 교사 비스무리하게 기억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